연예인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68]

페이지 정보

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635회 작성일 23-11-14 14:56

본문

포금 풀라고 하는데, 풀 수 없어서 다시 올림.



모두가 잘 알듯이 예송논쟁은 조선시대 최고의 키보드 파이트.

서인과 남인이 피 토하면서 싸운 조선시대 최고의 논쟁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가 효종과 인선왕후의 승하 때,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로 오질나게 싸운 사건.


사실 상복은 핑계였고, 주요 논쟁은


1) 효종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 (적장자냐 아니냐)

2) 왕과 사대부는 다른가? (왕은 사대부를 초월하는가?)


이 둘에 관한 싸움으로, 단순 키워질은 아니었음.

흔히들 예송논쟁을 유학의 교조화로 인한 폐해로 생각하는데,

이건 정말 조선시대 왕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었음.




그럼 이 예송논쟁의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예송논쟁의 당사자는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임.



자의대비.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장렬왕후는 자의대비로, 숙종 때 장희빈의 뒷배가 되어준 사람.



인조가 인열왕후를 잃고 3년 후 얻은 계비로 남편인 인조와 나이 차가 29살 난 어린신부.



가례.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장렬왕후와 인조의 결혼식>>



심지어 장렬왕후는 인조의 아들과 며느리인 효종, 인선왕후보다 5살이나 어렸음.


당연히 일반적으로 장렬왕후가 의붓 아들인 효종과 의붓 며느리보다 오래 살 수 밖에 없는 상황.

어쩌면 예송논쟁은 당연히 예상되던 사건이었음.



그럼 이 모든 일의 시작은 그저 인조의 어린 여자 밝힘 때문일까?

놀랍게도 아님. 인조는 장렬왕후를 멀리했음. 거의 별거 수준이었음.



그런데 조선 왕들을 보면, 이보다 더한 케이스들이 있음.




1. 선조


선조는 51세에 새장가를 드는데, 계비인 인목왕후는 19살.

무려 나이차가 32살.


아들인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림. 이미 광해군은 자식도 보았음.



2. 영조


이 분야 끝판왕.


손자와 할머니.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손자와 할머니, 왕과 중전 아님. 왕과 왕대비>>


영조가 66세에 얻은 계비 정순왕후는 15살. 무려 나이 차가 51....

손자인 정조보다 고작 7살 많은 할머니.

심지어 정순왕후 할아버지가 영조보다 어림.


물론 영조는 숙종의 교지때문이라는 변명거리는 있음.



모두 나이만 따지면 지금은 물론 당시에도 비정상적인 혼인이었음.
그리고 당연히 이 결혼들로 정국들이 꼬이는 상황들이 발생함.


조선 왕들 DNA에 어린 여자를 밝히는 유전자가 있는 것도 아닐텐데 왜 그랬을까?




images_pjj186_post_e05f8607-95f4-40cb-b1da-85f4489f7a2b_47647888c2d456977f45194bea69f0c2.jpe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우선 조선은 중전이 굉장히 중요한 나라였음.


중전은 내명부의 수장이니 당연히 중요할 수 밖에 없지만, 특히 조선은 고려와 달리 중전은 1명 고정이었음.


거기에 종법을 겁나게 따진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적자는 오로지 1명인 중전만 낳을 수 있음.


다시 말해서, 계승권이 최우선인 적장자, 적자는 오직 중전만 생산 가능.


이것만 따져도 중전이 겁나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음.
거기에 조선은 곤위 시 발작버튼이 하나 있음.



i16227524999.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그런데 중전이 그렇게 중요하면 새장가 들어서 계비 보느니,

후궁 중에 한 명 뽑아서 중전으로 올리면 안 됨?


ㅇㅇ 가능함.


실제로 숙종이 후궁은 중전이 될 수 없게 하는 교지 내리기 전까지,

계비들은 대부분 후궁이 중전으로 올라갔음.

또한, 후궁은 왕이 맘에 드는 나인들 데리고 가서 승은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각하겠지만, 중전을 뽑을 때와 마찬가지로 간택해서 맞는 경우도 많았음.


이런 후궁을 간택후궁이라고 하는데, 이런 간택후궁들은 당연히 간택하는 것이니 집안도 괜찮음.


이런 간택후궁들을 중전으로 올리는 케이스는 꽤 존재함.


오히려 어찌보면 궁녀들의 로망인 승은-후궁-중전이 된 케이스는 딱 한 명 밖에 없음.



장희빈.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당대 최고 미녀 배우만 맡을 수 있다는 '장희빈'

얼마나 예뻤으면, 실록에 미녀라고 기록되고 나인에서 중전까지 오른 유일무이한 존재.


"사간원의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염려하여 왕에게 미인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왕에게 장희빈 미인이니까 조심하라는 상소 올릴 정도.


여하튼 이런 식으로 후궁을 계비로 올리는 건 가능했음.

심지어 이게 잘만하면 계비를 새로 맞이 하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임.


선조가 인목왕후에게 새장가 갔다가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서 정국이 난리났음.


적장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며, 심지어 서장자도 아닌 광해군의 정통성이 크게 흔들림.


그나마 광해군이 세자시절은 goat고, 영창대군은 너무 어리니 어찌저찌 보위에 오름.


하지만,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이 트라우마를 못 벗어났고 결국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유폐하며, 영창대군을 죽이는 폐모살제까지 일어남.


그리고 결국 폐모살제는 인조 반정의 명분이 되었음.



본문의 예송논쟁도 마찬가지. 장렬왕후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의붓 아들인 효종과 의붓 며느리인 인선왕후의 죽음을 보고 상복을 입게 되면서 발생한 사건.


이런 예를 생각하면 그냥 후궁 중에 한 명을 중전으로 올리는게 훨씬 안정적.


그런데 이것도 조건이 있음.

1) 가문이 좋아야 하며 (간택후궁)

2) 적자가 이미 있으면 후일 적자를 낳았을 경우 정국이 혼란해짐.

3) 이미 후궁 소생의 자식도 있어도 문제. (서자가 적자가 되어버림)

적자가 있는데, 서장자 낳은 후궁을 중전으로 올리면 적장자가 바뀌어버림.

군이 대군으로 바뀌는 것을 넘어서, 세자가 바뀔 수 있음.


또한 정순왕후의 경우 후궁이 아닌 간택 중전으로 계비가 되었는데,

자신이 명종을 낳자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견제하기 시작함.


이러니 조건이 까다로움.


가장 안정적인 케이스는 문종의 3번째 세자빈인데.



다운로드.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 레즈였음.

당연히 궁 뒤집혀지고 폐서인 시킴.


그런데 이미 2번의 결혼 실패를 맞본 문종에게 또 간택해서 가례를 올리기도 뭐해서 궁여지책으로 문종의 후궁 중 한 명을 세자빈으로 승급 시킴. 심지어 가례도 안 올리고 교지만 내림.


이 후궁이 당시 유일하게 문종의 자식인 경혜공주를 낳은 여인이라,

세종이 문종의 픽을 무시하고 승급시킴. (문종은 다른 후궁을 세자빈으로 원했음)

이렇게 세자빈이 된 사람이 후일 단종을 낳은 현덕왕후.





다시 원점으로 와서 그럼 인조의 경우를 들여다 봐야 하는데,

사실 인조는 장렬왕후를 들이기 전에 이미 총애 하던 후궁이 있었음. 귀인 조씨.

이 귀인 조씨는 장희빈 마냥 기획 입궁된 궁녀 출신으로, 인조가 가장 아낀 후궁이었음.

얼마나 총애 했냐면, 29살 연하인 장렬왕후를 인조가 조씨 말만 듣고 멀리하고 별거까지 진행함. 심지어 조씨는 민회빈 강씨를 죽이는 데도 일조했을 정도.


인조가 가장 총애한 여인이니까,

인조입장에서는 귀인 조씨를 중전으로 올리면 그만임. 그런데 당시의 특수성이 있었음.





삼전도.jpe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바로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을 겪고 왕의 위신은 나락.

이 상황에서 인조는 가문 좋은 왕후가 필요했음.


귀인 조씨는 기획 입궁되었으나, 간택후궁은 아님.

그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입궁했다고 시작부터 말이 많았던 여인이고, 얼자 출신이라 알려짐.


거기에 임금을 끼고 온갖 전횡을 부리니까 귀인 조씨는 평판은 최악. 거기에 이미 딸이지만 자식도 있음. 그러니 인조는 조씨를 올리고 싶어도 못 올림. 숙종 왕권이라면 가능할텐데, 그것도 아니고, 삼전도의 굴욕까지 맞으니 절대 불가능.


병자호란만 아니면, 종법 무시하면서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고 민회빈 강씨 죽일 때처럼 억지로 조씨를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인조에게는 애초에 무리. 왕권도 딸리고 평판도 부족하고 간택후궁도 아니고 본인 위신도 나락.


그렇기에 인조는 조씨를 못 올리고, 좋은 집안의 계비를 간택할 수 밖에 없었음. 그냥 간택 안 하고 조씨를 사실상 왕비로 대우하며 그냥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조선에서 그건 무리.


아까 위에서 조선은 중전의 궐위인 '곤위'를 참을 수 없는 나라였고, 발작버튼이 있다고 했잖아.
이게 핵심임.


hqdefault.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대비'

대비는 왕의 '법적' 어머니만 가능하며, 따라서 이는 왕의 정식 배우자인 중전만 가능한 직위.


혜경궁 홍씨는 세자빈이었고, 자신이 낳은 정조가 왕이 되었지만,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기에 대비가 되지 못 했음. 그래서 혜경궁 홍씨의 위치가 며느리(중전) 보다 밑에 위치하는 이상한 사태가 발생했음.

인수대비는 약간 특이 케이스.

혜경궁 홍씨와 마찬가지로 세자빈이었고 자신의 자식인 성종이 왕이 되었으나, 마찬가지로 남편이 왕이 아니었기에 대비가 될 수 없으나, 성종이 자신의 아버지를 추존하였기에 살아서 대비가 되었음. 이 때문에 대비가 2명이 되는 초유의 사태 벌어져서, 어느 대비가 더 위에 있냐 시끄러웠음.



다시 말해 왕의 정식 배우자인 '중전'만 오를 수 있는 위치가 '대비'임.


명나라 청나라와 달리 왕의 생모가 태후가 되는 경우는 조선에서 불가능했음.

왕의 모든 자식들은 명목상, 법적으로 중전의 자식이 되고, 후궁은 생모여도 자식의 법적 어머니가 될 수 없음. 따라서 아무리 후궁 소생이 왕이 되어도 대비는 바뀌지 않음.


그래서 사극에서 후궁이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반말하거나 어머니라 칭하는 것은 고증 오류임.
안빈 이씨가 자신이 낳은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 효종에게 개털림.

(후궁은 예외 케이스인 무품빈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빈이 정 1품, 군과 옹주는 무품. 자식이 더 높음.)

따라서 대비가 될 수 있는 중전은 정말 중요한 직위이며,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였음. 실제 파워도 있었고.



9DTobvWwIrDf-_jDoAScuihuzQHiQiffA9WyM4jZce7DfadobxkgSg4mLO37_MgerJrw6avlHRqwIS0K7_CHNswccICc_SVzNSRq7nSUpytWdtTj5StuFv2oHkrEZVnauzF_Qx0LX_q6tkHiY546zw.webp.ren.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대비는 왕보다 높은 '전하'임.


왕이 어릴 때 수렴청정으로 조정을 이끌고 왕의 유년기를 보호하는 장치가 바로 '대비'의 존재임.

거기에 정변이 일어나면 최종적으로 이 '대비'의 재가를 받아야 함.
그래서 인조반정 때 인목왕후가 광해군 목 가지고 오면 재가한다고 우긴 것.


그렇기에 유사시 조정을 지탱하는 최종 관문이 바로 '대비'임.


이걸 염두해 보고 인조와 영조의 계비들의 경우를 바라보면 답이 나옴.


적자를 생산하는 것이 중전의 제1임무지만,


이미 인조에게는 장성한 아들이 있음. 그 장성한 아들 역시 자식이 있었고.
영조도 마찬가지로, 세손이 있었음.

후계 구도가 이미 잡혔음.


그런데 새장가 들어서 그 구도를 흔든다? 말이 안 됨.


즉, 인조나 영조가 계비에게 바란 것은 중전의 역할이 아니라 '대비'의 역할임.


굳이 계비를 들여 새로운 자식을 낳으면 인종, 광해군 케이스가 생각 안 날 수가 없음. 그건 조정과 왕실을 흔드는 일임.
따라서 이들이 계비에게 바란 것은 '대비'의 역할.


그럼 도대체 대비가 왜 중요하냐? 왜 조정을 버티는 최종 관문이 되었느냐?


그냥 은퇴 중전 아닌가 싶지만.

조선 초에 대비의 존재가 정말 중요한 사건이 터짐.





























Video Player
00:00
00:00 / 00:00


중전 '곤위' 시의 발작버튼.



바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



단종의 할아버지인 세종은 그렇게 여색을 가까이 했지만, 소헌왕후가 죽고 중전을 따로 안 두었음. 계비가 없다는 말.


문종은 알다시피 여색에 별 관심이 없었음.

거기에 배우자들 복이 지지리도 없었음. 그래서 세자빈이 원자 생산 이후 산욕열로 죽은 이후, 다시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음. 그리고 즉위를 함.


즉, 실질적인 중전이 애초에 없던 유일한 왕이 문종.


그런데 문종은...



순식간에 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12살의 단종이 되어버림.

단종 위에 존재하는 '전하'가 전혀 없게 됨.


아버지 문종의 배우자는 세자빈 시절 승하한 자신의 어머니 현덕왕후이기에 당연히 대비가 없음.

할아버지 세종의 배우자는 소헌왕후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마찬가지로 세종의 계비가 없었기에 대왕대비가 없음.


단종을 살뜰히 챙긴 후궁들이 아무리 버티고 있어도, 이들은 결코 대비가 될 수 없음. 그저 선왕의 후궁일 뿐.


따라서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정을 이끌 왕실 사람이 없음.

유년기의 왕을 보호해줄 집안 어른이 존재치 않음.

단종이 친정을 할 나이라면 상관 없으나, 12살 꼬맹이였음.


그렇기에 문종이 고명 대신으로 단종을 보호할 김종서 황보인을 세웠으나,

이는 황표정사로 이어졌고, 수양대군을 위시로한 종친의 입장에선 개빡치는 상황이 발생.

심지어 고령의 고명 대신의 뜻대로 정국이 흘러가니 젊은 관리들도 불만이 한가득.



황표정사.webp.ren.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여기가 이씨의 나라냐 김씨, 황보씨의 나라냐!


만약 대비가 있었으면, 종친들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충분히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음. 특히 대왕대비인 소헌왕후가 살아있었으면,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애초에 일으킬 수가 없음. 수양대군이 효자인 것을 떠나서 상황상 불가능.


소헌왕후가 아니라 문종의 계비인 대비가 있었어도 마찬가지.


어머니 또는 형수가 수렴청정하며 정국을 이끄는데, 그에 불만을 갖고 칼을 들이민다? 조선은 유교 근본의 종법에 미친 나라라서 명분 자체가 사라짐. 세조가 나라를 꾸려나갈 수 가 없음.


조선이 얼마나 종법에 미친 나라냐면, 그 연산군을 쫓아내는 중종반정 때도 반정의 공신들이 반정성공 한 뒤에도 불안해했음. 이거 전국에서 들고 일어나는 것 아니냐며.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만큼 조선은 종법에 미친 나라였음.



단종은 특히 조선 모든 왕들 중에서 가장 정통성이 높은 왕.


적장손으로 태어나 원손 - 세손 - 세자 테크를 밟음.

심지어 아버지 문종과 달리 자신은 아버지가 세자일 때 태어남.


비슷한 케이스인 숙종의 예를 들면, 숙종의 왕권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다들 알 것임.

위에도 말했지만, 간택 후궁도 아닌 승은나인을 중전으로 올린 인물임.

환국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모든게 전부 숙종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혈통과 정통성만으로 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

어마어마한 왕권이 숙종에게 있었음.


만약 단종이 친정을 할 수 있을 나이가 되었으면, 수양대군은 문종 때와 마찬가지로 찍소리도 못 했을 상황.

압도적인 왕권을 소유했을 것.



계유정난.jpg 예송논쟁의 근본적인 이유 (재업)


그런데 정통성이 높으면 뭐함? 나이가 어리고 지켜줄 집안 어른이 없는데.


계유정난이 일어난 여러 배경들과 상황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이 바로 단종을 지켜줄 '대비'의 부재였음.


그런데 대비는 오직 중전만 가능함.

다시 말해서 세종과 문종 때의 중전의 곤위가 이 모든 시발점임.


따라서 수양의 후손들은 이 사실을 잘 기억하고, 중전의 곤위에 발작버튼 일어나서 반드시 채워 넣음.
이것이 조선 왕들이 늦장가를 들어 정국에 온갖 혼란을 야기하는게 뻔해도 반드시 늦장가를 갔던 이유.


다시 말해, 인조는 장렬왕후라는 어린 신부가 자신의 자식과 며느리인 효종과 인선왕후가 나이가 더 많아 일찍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도 늦장가를 갈 수 밖에 없었음. 가장 아끼던 귀인 조씨를 중전으로 못 올리고 어린 신부를 맞이한 인조는 눈물을 머금고 결혼하지 않았을까?




물론 예송논쟁의 일차적 원인은 효종의 정통성 논쟁임.

그러나 더 파고들어 근본적인 이유를 들자면 계비를 둘 수 밖에 없었던 수양대군 때문이 아닐까?



3줄 요약


1) 예송논쟁의 시작은 인조의 늦장가 때문이다.

2) 조선은 중전의 부재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3) 수양대군



반박시 네 말이 옳다.

111222